우리는 흔히 우연한 기회에 텔레비전을 시청하다가 프로그램 내용이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내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일부러 시청할 때엔 그 프로그램이 매우 유치하더라도 우리는 그걸 잘 느끼지 못한다. 이미 우리도 유치하게 길들여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막연하게나마 우리가 느끼고 있는 텔레비전의 유치함에 대해 호주 머독대 교수인 존 하틀리John Hasrtley는 ‘소아주의’라고 부르면서 소아주의야말로 수용자의 존재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증거라고 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위험과 불확실성을 최소화하면서 시청률을 최대화하고자 하는 텔레비전은 다양한 속성을 가진 거대 집단을 모두 만족시키기 위해 ‘어린애와 같은 구경꾼들’을 상정한다는 것이다. 즉, 지적으로 수준이 낮은 프로그램은 지적 수준이 높은 사람들도 볼 수 있지만 그 반대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만약 어떤 방송사가 수준이 높은 프로그램을 내보낸다면, 그 방송사는 높은 시청률을 올릴 수 없는 위험을 안게 되거나 시청률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는 불확실성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 방송사는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수용자를 그 실재와는 무관하게 아이들과 같은 특성과 속성을 지니는 존재로 가정하는 것이다.
텔레비전 시청 상황은 영화 관람 상황과는 달리 수용자의 집중을 얻어낼 수 없기 때문에 이건 매우 중요한 원칙들이다. 프로그램 제작자가 살아남으려면 자신의 미학적 가치와 원칙을 반드시 시청률이라고 하는 평가 기준에 맞춰야만 한다. 타협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시청자의 정신 연령 수준을 어느 정도로 낮춰 잡을 것인가 하는 건 나라마다 각기 다를 수 있다. 이른바 ‘유아적 문화’가 강한 나라일수록 시청자의 정신 연령 수준을 더욱 낮춰 잡으리라는 가설이 성립될 수 있을 않을까? 그런 점에서 일본이 좋은 사례다.
일본에서 국가와 국민의 관계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유별나다. 정부는 국민을 자식처럼 돌보고 국민은 덩부가 없으면 부모 잃은 아이처럼 불안해하는 관계다. 그런 관점에서 여러 일본 전문가들이 ‘일본 문화의 유아화’를 지적하고 있다. 일본인이 어린애처럼 길들여져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로 인한 장점은 많다. 무엇보다도 법과 공중 도덕을 잘 지킨다. 다만 문제는 너무 지나치다는 데 있다.
텔레비전은 ‘열두 살이기를 바라는 성인들의 나라’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 한국인이 보기에 일본 텔레비전은 너무 유치하다. 물론 유아적 문화는 일본만의 현상은 아니다. 일본이 훨씬 심하다는 것일 뿐 한국도 일본의 뒤를 좇고 있다. ‘어린이 같은 어른’이란 뜻을 가진 키덜트 문화의 확산이 그걸 잘 말해준다.
다소 다른 차원이기는 하나 텔레비전의 소아주의를 부추긴다는 점에 있어서 방송 규제 기관도 일조하고 있다. 늘 텔레비전이 가족 매체임을 강조하는 규제 기관은 시청자를 무조건 아이들과의 관계서 보는 경향이 있다. 물론 연령별 등급제를 실시한다곤 하지만, 언제든 아이를 포함한 온 가족이 볼 수 있다는 전제 아래 규제를 하는 경향이 있다. 텔레비전은 성인이 아니라 아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셈이다. 물론 다매체, 다채널 시대에 그런 압력은 약화되고 있다지만 여전히 지상파방송의 힘이 막강하기에 규제 기관이 소아주늬를 부추기는 것은 건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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