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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 쇼핑/브랜드

별을 달고 태어난 컨버스 스토리, 스트릿 패션의 아이콘

by 코즈모코즈모 2023.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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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매사추세츠 몰든에  마퀴스 밀즈(Marquis Mills, 1861~1931)는 계단에서 넘어진 뒤 미끄러지지 않는 밑창이 부착된 신발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이것이 누구나 알고 있는 컨버스 탄생의 비화이다. 또 재밌는 사실은 밀즈가 어머니의 결혼 전 성인 '컨버스'를 브랜드 이름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컨버스는 또한 밀즈의 넷째 사촌인 엘리샤의 성이기도 했는데, 엘리샤는 지지율 높은 시장이자 스니커즈를 생산하며 큰 부를 축적한 사업가이기도 했다. 

현재-보스톤에-위치한-컨버스본사
현재 보스턴에 위치한 컨버스 본사

컨버스는 빠른 시일 내에 4,000 켤레에 달하는 방한용 슈즈를 만들 수 있는 회사로 거듭났지만 마퀴스 밀즈는 더 큰 그림을 그렸다. 1917년 밀즈는 기능성 운동화인 컨버스 올스타를 만들었고 여기에 6년 뒤 컨버스 최고의 세일즈맨의 이름인 척 테일러의 이름을 붙였다. 당시 미국인들은 신발 가게에 들어가 ‘컨버스 올스타 주세요’가 아니라 ‘척 테일러가 파는 그 신발 주세요’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컨버스를-신은-제임스딘
컨버스를 신은 제임스 딘

농구가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처음 채택된 1936년 베를린 올림픽부터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까지, 컨버스는 올림픽 ‘공식 슈즈’로도 지정되었다. 1936년 미국 농구 대표 팀이 미국을 상징하는 화이트와 레드, 블루 컬러가 들어간 척 테일러 올스타를 신고 금메달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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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1957년 컨버스는 로우-톱 버전을 출시하며 농구 선수에서 나아가 대중의 시선까지 사로잡게 된다. 당시 미국농구 프로와 대학팀 90%가 컨버스 올스타를 신었다고 하니 놀랍다.

당시-미국-농구화-시장을-정리한-컨버스올스타
당시 미국 농구화 시장을 정리한 컨버스 올스타

 

1970년대 컨버스는 미국 공수부대에도 물품을 공급했으며 캐나다 배드민턴 선수인 잭 퍼셀의 이름을 딴 스니커즈인 젝 퍼셀 모델의 생산권을 인수하기도 했다. 뒤이어 컨버스는 1984년 LA 올림픽의 후원사로, 또 줄리어스 어빙, 래리 버드, 매직 존슨과 같은 당대의 유명 농구 선수들의 후원을 하며 그 명성을 드높였다.

캐나타-배드민턴-선수-잭퍼셀
캐나다 배드민턴 선수 잭 퍼셀

하지만 컨버스가 지금처럼 모든 사람들이 한 번쯤은 신어본 대중적인 브랜드를 거듭나는 데는 록 스타들의 도움이 컸다.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밴드라는 평가를 받는 'AC/DC'의 프런트맨 앵거스 영은 공연할 때마다 컨버스를 신었다. 펑크 록의 시조 라몬즈는 멤버들이 컨버스를 신지 않은 사진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1970년대에 자유로움과 반항을 상징하던 록 스타들 덕에 올스타는 젊은이들의 문화를 대변하는 스니커즈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또 커트 코베인은 본인의 컨버스 앞코에 다양한 낙서를 한 뒤 신발이 다 닳도록 신었고 컨버스는 반스와 함께 스케이터에게 큰 사랑을 받는 슈즈 브랜드이기도 하다. 

AC/DCx컨버스-척테일러올스타
AC/DC x 컨버스 척 테일러 올스타

그러나 1990년 컨버스는 과거 성공과 명성을 뒤로하고 결국 약 한화 2,000억 원의 부채를 정산하기 위해 나이키의 인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2003년부터 컨버스의 모기업은 나이키인 것이다. 하지만 현재에도 컨버스는 꼼데가르송과의 협업을 통해 10년 넘는 시간 동안 스트릿 패션의 비전을 제시했다고 평가받는다. 최근에는 12년 만에 처음으로 원스타 모델의 협업을 발표했다.

컨버스x꼼데가르송-플레이
컨버스 x 꼼데가르송 플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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