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자전거 거치대를 보면 흉물스럽게 녹슨 자전거들이 즐비하다. 과연 주인이 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낡은 자전거들을 보고 있노라면 없애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누구나 했을 것이다. 성인 자전거부터 어린아이 자전거까지 방치되어 눈비를 맞으며 녹슬어가고 있다. 필자의 경우 고가의 산악자전거도 보유하고 있는데 도난의 위험 때문에 밖에 둘 수도 없고 해서 서재에 옮겨 두었는데 오랜만에 자전거를 끌고 나가려면 너무나 귀찮은 일이 되어버렸다. 어쩌다가 옷을 챙겨 입고 끌고 나가려고 하면 튜브에 바람이 빠져 있기가 일쑤여서 라이딩을 나가려다 포기한 적도 여러 번이다.
하지만 필자에겐 큰 MTB 말고 작은 접이식 자전거 한대가 있다. 바디가 파란색인데 네모로 접혀 현관 창고에 넣어두었다가 꺼내 탄다. 접이식 자전거를 미니벨로minivelo는 Mini(작은)+Vélo(프랑스어로 의미는 자전거)라 부르는데 일반적으로 휠이 20인치 미만이어야 한다. 폴딩자전거라고 불리는 이 작은 자전거들은 탈 것을 넘어 휴대용품의 범주로 자전거의 의미를 확대시켰다. 내가 소유한 자전거는 다름 아닌 1976년부터 자전거를 제작하기 시작한 영국의 브랜드 브롬톤Brompton의 모델이다. 세상에서 가장 작게 접히는 자전거로 유명한 브롬톤은 바퀴가 16인치이고 크기에 비해 무게는 상당히 무거운 편이다. 브롬톤 마니아들은 각종 경량화 부품을 사용하여 자신의 자전거의 무게를 8Kg 아래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무게가 가벼워질수록 튜닝비는 자전거의 본래 가격을 훌쩍 넘기게 된다. 이미 브롬톤은 고가인데 말이다.
“브롬톤은 스위스 군용 칼 같아요. 숨겨져 있다가 원할 때 갑자기 나타나는 거죠. 한번 사용해 보면, 브롬톤은 당신 삶의 일부가 될 거예요. 곧 브롬톤 없이는 살 수 없을 겁니다.”
- 윌 버틀러 아담스 브롬톤 CEO, 2022년 파이퍼 팟캐스트
레버를 풀어 핸들을 세우고, 프레임 아래 접혀있던 앞바퀴를 옮기고 안장을 잡고 뒷바퀴를 꺼낸다. 핸들과 안장을 단단히 고정시키면 끝이다. 특히나 여타의 자전거는 프레임 중간을 접는 형태가 많은데 브로톰은 그렇지 않아 견고하고 안정적이다. 버디BIRDY, 스트라이다Strida, 몰튼Moulton, 다혼DAHON 등 시중에 미니벨로 브랜드가 많은데 모두 장단점이 있게 마련, 하지만 미니벨로를 타는 가장 큰 이유는 폴딩에 있기에 브롬톤은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타 브랜드에 비해 매력적이다. 다른 미니벨로들을 접으려면 마치 박스에 억지로 자전거를 작게 접어 구겨 넣는 느낌이 들지만 브롬톤은 너무나 콤팩트하고 반듯하게 접힌다.
브롬톤을 처음 만든 엔드류 리치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엔지니어링을 전공했고, 컴퓨터 프로그래머 일을 하고 있었다. 발명이 취미였던 그는 아버지가 선물한 비커톤Bickerton 접이식 자전거를 보고 내가 더 휴대하기 편한 접이식 자전거를 만들 수 있겠다 생각하고 연구를 거듭하게 된다. 리치는 런던 외곽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디자인 고안에 몰두했다. 몇 달의 연구 끝에 설계도면을 완성한 그는 자전거 제조업체의 문을 두드렸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결국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1976년 직접 회사를 차렸다. 회사명인 브롬톤은 리치의 아파트에서 내려다보이던 성당의 이름이라고 알려져 있다. 첫 시제품을 개발한 이후 5년간 시행착오를 겪던 브롬톤은 1981년 ‘마크 원’ 모델을 내놓으면서 본격 생산에 나선다. 그 이후 끊임없는 기술 개발을 거듭했으며 세계 여러 셀럽들의 사랑을 받으며 대중의 인지도를 넓혀갔다.
브롬톤이 본격적인 상승 궤도에 올라선 계기는 2002년 전문 경영인으로 윌 버틀러 애덤스를 최고경영자(CEO)를 영입한 것이다. 뉴캐슬대에서 엔지니어링을 전공한 그는 키가 193㎝로 매우 큰데 자그마한 브롬톤을 보며 ‘내가 올라타면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애덤스는 “막상 자전거에 앉은 뒤엔 발명가 리치가 만들고 있는 브롬톤 자전거가 꽤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지난해 7월 BBC와의 인터뷰에서 회고했다.
브롬톤은 그 이후 생산을 늘이며 2021년 연매출이 7600만 파운드(약 1214억 원). 2019년 4200만 파운드(약 671억원), 2020년 5700만 파운드(약 910억원)로 꾸준하게 성장해 나갔다. 런던에서 한 해 판매되는 15만 대 자전거 중, 3만 대가 브롬톤 자전거이고 현재 생산하는 자전거의 80%가 한국을 포함해 48개국에 수출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멋진 건축물, 공원, 운하, 강이 있는 도시를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이걸 외면한 채 지하에 있는 작은 구멍(지하철)을 향해 내려가고, 기꺼이 몸을 짜부라트리죠. 건강하지 못해요. 도시인들은 기본적으로 행복하지 않아요. 브롬톤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들고 싶어요. 자전거로 해결책의 일부를 제시하고 싶죠.”
- 윌 버틀러 아담스, 2016년 구글 강의에서
“코로나로 인해 사람들은 전에 경험하지 못한 도시에 살게 됐어요. 구석구석 차가 다니지 않아 도시의 공기 질이 향상됐죠. 또 갑자기 가족과 함께 있게 됐고, 도시가 아이들을 키우기 좋은 장소처럼 느껴졌습니다. ‘살기 좋은 도시’라는 가능성을 엿보게 된 거죠. 저희는 앞으로 이 가능성에서 출발해 많은 것들을 해보려고 합니다.”
- 윌 버틀러 아담스, 2022년 파이퍼 팟캐스트에서
영국 런던의 극심한 교통체증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브롬톤을 타고 가다 접어서 버스나 전철로 갈아타고, 다시 내려서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 브롬톤은 '자출족(자전거로 출퇴근)'의 로망이 되었다. 하지만 필자의 경험으로는 출퇴근은 너무 힘들다. 공유 자전가가 훨씬 편하다. 브롬톤은 생각보다 너무나 무겁고, 기어가 고작 최고 6단이라서 오르막길을 오르기엔 너무나 벅차다. 또 생각보다 접어서 끌고 다니기 불편하다. 그리고 우리나라 지하철역은 계단과 에스컬레이터가 너무나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롬톤의 매력은 다양한 컬러를 고를 수 있다는 점, 브롬톤과 역사를 함께 해온 브룩스사의 전용 가죽 제품들을 활용하여 외관을 더욱 클래식하고 아름답게 드레스업할 수 있다. 프레임에 가방고리(캐리어블록)이 설치되어 있어 가방을 멋지게 달수도 있고 가죽 안장으로 교체하여 자신만의 자전거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 요즘은 외관뿐만 아니라 브롬톤의 무게를 경량화하는 튜닝도 마니아들 사이에선 일반적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튜닝에 빠져들다 보면 지갑이 비어버리게 마련. 필자도 튜닝을 포기하고 순정에 가까운 브롬톤을 10년째 탄다.
브롬톤은 기본모델이 200만원을 훌쩍 넘길 정도로 고가이다. 그래서인지 브로톤과 비슷한 구조로 만들어진 중국산 자전거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브롬톤 자전거를 생산하는 런던 브렌트퍼드 공장에서는 1200개의 부품 중 80%를 자체 생산한다. 독자적으로 개발한 맞춤형 생산 장비만 500여종에 이른다.조립은 물론, 수공예, 점검 과정 등 각 공정마다 창업 초기 멤버도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해외 공장도 없다. 수출품의 대부분은 런던에서 만든 것들이다. 애덤스는 “해외 시장의 비중이 갈수록 커지고 있지만 인건비가 싼 아시아 등으로 공장을 이전할 생각은 없다”고 외신들에 말한 적이 있다. 당장 수익은 나겠지만 품질 유지가 어려워 소비자의 신뢰를 잃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브롬톤을 자전거의 애플이라고 말하는데 자전거는 IT제품이 아니다. 또 브롬톤은 다양한 기능보다는 기본에 충실하다. 아이폰은 우리가 알지 못할 정도로 숨은 기능이 많지만 브롬톤은 숨은 기능이 없다. 그게 브롬톤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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